더 단단한 윤미혜로 / 윤미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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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im 작성일26-03-11 16:19 조회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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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단단한 윤미혜로
윤미혜(해피만 1조)
다비다 해피맘1조 부조장 윤미혜입니다. 지금부터 저의 살아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의 유년기 시절은 암울했습니다. 부모의 이혼과 함께 외딴 시골로 보내져 더부살이를 했습니다. 그때가 초등학교 4학년 가을이었지요. 거기서 온갖 고생을 했답니다. 밭매기, 아궁이에 불을 떼서 밥하기, 똥 푸기, 김장, 12번의 제사, 집안일, 산에 나무하러 가기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고, 그때는 정말 매일같이 달을 보며 설거지를 하면서 울었습니다. 그곳에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셨는데 할머니는 욕쟁이셨고, 할아버지는 저를 때리셨습니다. 겨울에 지하수 퍼 올리는 모터가 얼어서 터졌다고, 강아지도 도망갔다고, 밥을 천천히 먹는다고 등등 그런 이유로요. 나무가 부러지고 또 부러지도록 맞았습니다. 그때는 어릴 때라 지옥이 뭔지도 몰랐어요. 지금 생각하면 지옥이었어요. 엄마가 차려준 밥만 먹다가 생판 모르는 낯선 곳과 모진 일들...
그러던 5학년 봄에 엄마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곳은 전라도였습니다. 엄마는 내 머리에 이가 많다며 가게 점방에서 제 머리를 감기시고는 “엄마 따라갈래? 여기서 살래?” 하고 물어보았지요. 저는 당연히 엄마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 웬 아기와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엄마는 설명도 안 해주고 저를 데리고 갔는데 그때 “새 아빠고 네 동생이다.”라고 했으면 제 대답은 어땠을까요? 아무튼 그렇게 다시 서울 상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고난의 시작이었지요. 새 아빠의 눈치를 보고 사는 것, 엄마의 시댁 식구들이 올 때면 엄마를 엄마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 옷을 사더라도 이모가 사줬다고 거짓말을 해야 하는 것 등등.
중2가 되었을 때였어요. 그때 집주인이 집세를 올려달라고 해서 엄마는 일을 시작해야 했지요. 그때 저에게 또 물어봅니다. “애기 볼래? 학교 갈래?” 저의 대답은 애기를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공부할 분위기도 아니고, 학교에서는 적응도 못하는 왕따, 은따였으니까요. 그래서 집안일을 하고 아기 분유 먹이고, 기저귀 갈고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동생의 친할머니가 오셔서 제 자리를 빼앗았습니다. 엄마는 학교에다 전화 한 통도 없이 나보고 다시 학교에 가라고 합니다. 학교에서는 무단결석으로 저를 문제아로 낙인 찍어 제적처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학교에 갔지만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너 왜 왔니?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학교를 나오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습니다. 집에 다시 오니 엄마는 한숨을 쉬더니 앞집 아줌마 따라서 공장에 나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나이 15세 때였습니다. 공장에 가는 시간과 학생들 학교 가는 시간이 같아 저는 출근 때마다 고개를 숙이며 공장을 가야 했지요. 창피해서요. 그렇게 일한 돈은 엄마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친구 따라서 봉제공장으로 옮기고, 기숙사로 들어갔지만 외롭고 모든 것이 처음이라 너무 낯설었지요. 항상 힘들다고 엄마한테 전화한 기억이 납니다.
엄마는 어느 날 집을 나갔습니다. 나는 이제 엄마랑 단 둘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좋아했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엄마는 내가 벌어다준 돈으로 월세 방을 얻고 유부남과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나는 실망이 커서 이제는 엄마에게 돈을 안 보내고 모았다가 월세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19세였습니다. 불편한 기숙사 생활에서 빠져 나왔지만 지독한 외로움의 시작이었습니다. 힘들고 외로울 때 엄마를 찾아가면 엄마는 냉정하고 차갑게 대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엄마의 친오빠 가족들을 우연한 기회에 만나서 광명시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아저씨랑 헤어졌으니 엄마랑 같이 살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믿고 월세 방을 정리하며 보증금을 엄마에게 주고 짐을 챙겨서 엄마에게 갔지만 그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집에도 밤늦게 들어가고 그 아저씨한테 인사도 안하고 내 방에만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은 엄마는 나보고 400만원을 주면서 빨리 방을 구해서 나가라는 겁니다. 내가 준 돈은 600만원인데 말입니다. 할 수 없이 대충 방을 얻어 나갔고, 그때부터 엄마랑 연을 끊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혼자 살면서 식당일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 아빠를 만났고 만삭이 된 몸으로 엄마를 찾았지만 결혼식은 동생 고등학교 졸업하면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나 아빠랑은 혼인신고만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를 낳자마자 하나 아빠는 직장을 그만두고 가정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술을 먹든 안 먹든 폭력적이었습니다. 집을 나가고 싶었지만 하나가 눈에 밟혀 그만두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 아빠랑 크게 싸우다가 하나 아빠가 제 목을 졸랐습니다. 이렇게 살다가는 제가 진짜로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 아빠 없는 틈을 타서 캐리어를 사고 아기분유와 기저귀를 넣어서 집을 나왔습니다. 여성 쉼터를 거쳐 살림터라는 시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1년을 살다가 자립을 해서 나왔습니다. 옥탑방을 2번 거치고 임대아파트가 당첨이 되어 하나랑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우울증이 심해져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증 진단을 받아 약을 복용하며 아이를 키우며 살았습니다. 하나 아빠랑 이혼을 하고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영접했는데 제 나이 31세 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랑만 열심히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장애인작업장을 가게 되었습니다.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한 달에 10만원 받고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 가람이 아빠를 만나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었지만 그 사람 역시 폭력을 쓰게 되었고 아이들에게까지 피해가 가게 되자 가정폭력으로 신고를 해서 가람 아빠랑도 헤어졌습니다. 아이들과 그냥저냥 살고 있었는데 김혜란 목사님께서 연락을 주시며 다비다에 다시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다비다도 가끔 생각했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 갔는데 김혜란 목사님께서 다시 손을 잡아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돌아온 탕자가 되었습니다.
작년 11월에 가족관계증명서를 떼게 되었는데 아빠가 사망으로 뜨는 것입니다. 아빠는 8월 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셨나보다 하고 지내는데 SH공사에서 아빠가 사시던 집 1/3을 상속 받겠느냐는 우편물이 왔습니다. 아빠는 수급자셨고 같이 사는 분도 어려운 것 같아 유산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아빠는 재혼하여 딸 한 명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그 딸이 “친생자부존재관계” 확인을 위한 소송을 건 것이었습니다. 내가 아빠의 친딸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빠는 돌아가셨고 나는 유산을 포기했는데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딸과 유전자 검사를 하였지만 친자매 관계 성립이 안 된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법원에 갔는데 엄마도 나와 있었습니다. 엄마는 내가 소송한 것으로 잘못 알고 내 욕을 그렇게 하고 다녔습니다. 나는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아빠가 내 아빠가 맞느냐고요. 들려오는 대답은 엄마도 아빠도 친부모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나왔던 출생의 비밀이 나에게 생긴 것입니다. 아빠가 나를 정릉에서 데려왔다고 했습니다. 나의 친부모는 아파서 저를 키울 능력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빠 딸이 저를 소송한 것은 서류 정리를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호적에서 제외하려고요. 판사가 엄마에게 저랑 호적 정리를 원하느냐고 물어보니 “호적 정리를 빨리 해주세요.”라고 했습니다. 나는 엄마랑은 안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원하고 나의 친모도 아니니 동의했습니다. 나는 법원을 나온 뒤 카페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엄마하고도 유전자 검사를 했지만 모녀가 아니라고 나왔습니다.
지금 저는 정체성이 혼란스럽습니다. 성씨도 윤씨가 아닙니다. 나의 부모도 누구인지 모르지만 찾을 수도 없고 찾기도 싫습니다. 무기력에 빠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안에서 일주일 동안 위로를 받았습니다. 설 명절도 외로울 줄 알았지만 하나님과 다비다 가족들 덕분에 즐겁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의 손을 다시 잡아주신 김혜란 목사님과 저를 위로해주신 이주은 목사님, 이영복 장로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과 다비다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더 단단한 윤미혜로 살아갈 것입니다. 다비다 식구들 여러분,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